2023년11월22일_창세기5장 | 김덕종 | 2023-11-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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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세기5:1-32절 개역개정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성경에는 족보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담의 족보는 다른 족보와 좀 다른 특징이 보입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낳았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족보에는 죽었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5,8,11,14,17,20,27,31절에 걸쳐 9번이나 반복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떠한 인간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5장의 족보에 나오는 사람들의 수명을 보면 엄청납니다. 아담은 930세, 셋은 912세, 제일 오래 산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살았더라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뱀은 하와를 유혹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지만 이 뱀의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인간은 죽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까? 본문은 음울한 죽음의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죽음을 벗어난 사람이 나옵니다.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 소식이 우리에게도 소망이 됩니다. 애녹이 죽음에서 벗어났다면 우리도 그 예외가 될 소망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에녹은 어떻게 예외가 될 수 있었을까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에녹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히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여기에 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 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상호의존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까?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을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사는 것이라고 번역합니다. 영어성경인 NLT에 보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결코 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나와 예수님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요나와 예수님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차이점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지만 그 뜻에 순종하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합니다. 중요한 것은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이런 에녹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절망 가운데에서도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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