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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7월13일_욥기25장 | 김덕종 | 2022-07-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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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욥기25:1-6절 개역개정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3.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5.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인터넷 게시판에 보면 가끔 ‘선비질 한다’는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비 같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좋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바르고 꼿꼿한 사람을 선비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말에 ‘질’이 붙으면 의미가 좀 부정적으로 변합니다. 선비질이라고 하면 자기는 의식 있고 개념 있는 사람인 척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며 가르치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네티즌은 이렇게 선비질을 하는 사람을 ‘도덕과 윤리를 악플의 도구로 삼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선비질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처한 현실은 모른 척합니다. 진흙탕과 같은 현실에서 한 발 떨어져 자신만 고고한 척 자신의 지식으로 충고를 합니다. 욥기 25장에 나오는 빌닷의 모습을 보면서 이 선비질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습니다. 욥기 25장은 빌닷의 세 번째 발언입니다. 세 번에 걸친 친구들과 욥과의 논쟁 중 친구들의 마지막 발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발언에서 빌닷은 앞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동안 빌닷은 욥을 아주 거칠게 몰아쳤습니다. “18:12 그의 힘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13 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 이런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악인이 바로 욥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자식들도 언급했습니다. 욥의 자녀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욥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발언을 거침없이 했습니다. 그런데 욥기 25장에서 빌닷의 이야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짧기도 짧습니다. 내용도 앞의 발언과 비교하면 너무나 점잖습니다. 빌닷은 먼저 하나님의 절대성을 이야기 합니다. “2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3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빛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먼저 절대적인 하나님을 말하고 이런 절대적 하나님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야기 합니다. “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이런 절대적인 위엄을 가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의롭다 할 수 없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깨끗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달도, 별도 하나님에게는 밝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다만 구더기 같고 벌레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아주 잘 대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잘 정돈된 논리를 가지고 욥에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욥 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죄가 없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비질입니다. 욥이 처한 상황은 이렇게 한가롭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죽음 보다 더한 고통 속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니 너도 죄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면 지금 말을 하고 있는 빌닷도 죄인입니다. 하지만 빌닷은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을 전혀 받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너나 나나 다 죄인이니 하나님 앞에 겸손하자고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입니다. 불구덩이 같은 현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자신의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빌닷은 지금 욥에게 선비질을 하고 있습니다. 욥의 고통은 외면한 채 뜬 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경지식은 현실에 맞닿아있어야 합니다. 현실에 기초하지 않은 신학은 사상누각이 되기 쉽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 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려운 순간이 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교리를 많이 가르치는 편입니다. 교리를 가르치다보면 때로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진 현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리를 가르칠 때 우리의 삶과 연결시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예수님의 지위에 대한 교리 중에 비하신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태초부터 창조주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낮아지셨는가에 대한 교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출생하셨습니다. 율법의 제정자이신데 율법에 복종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끝내 죽음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낮아지신 것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조금 전에 이야기 했던 예수님의 비하신분에 대한 정리입니다. 그렇게 이렇게 바울이 예수님의 비하신분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를 위해 낮아지신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어떤 마음인가요? 사람을 위하여 낮아지신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본받아 우리 역시 낮아져서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하신분에 대한 교리가 섬기는 삶에 대한 실천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지식이 많더라도 그 지식이 삶과 연결되지 않으면 그냥 죽은 지식입니다. 아무리 신학적으로 아는 것이 많더라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다른 사람을 죽이는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빌닷의 지식은 현실과 동떨어져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것은 아무 쓸모없는 죽은 지식일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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