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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6월17일_욥기14장 | 김덕종 | 2022-06-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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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욥기14:1-22절 개역개정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2.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3.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5. 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6.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가 품꾼 같이 그의 날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 7.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8.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9.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10.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11. 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12.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13.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14.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15.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 16.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감찰하지 아니하시나이까 17. 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18. 무너지는 산은 반드시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19.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 20. 주께서 사람을 영원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보내시오니 21. 그의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어도 그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22.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 뿐이니이다 신영복 교수님의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자신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존재 그 자체 때문에 미워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없이 사는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아픔을 이야기 합니다. 감옥 생활을 통해서 얻은 귀한 삶의 통찰입니다. 신영복 교수님은 간첩 조작 사건으로 20년 20일을 감옥에 있어야 했습니다. 죄 없이 갇힌 이 감옥 생활이 끔찍한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 인생에 대한,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감옥에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감옥에 있다고 다 그 깊은 성찰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감옥에서 오히려 더 나쁜 일을 배우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 감옥 안에서의 고통의 시간이 성찰과 배움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욥은 지금 감옥에 있지는 않지만 누구 못지않은 고통 속에 있습니다. 너무나 견디기 힘든 시간이지만 이 시간들을 통해 욥은 인생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일관성이 있지는 않습니다. 한탄했다, 뭔가 소망을 이야기 했다, 또 다시 절망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일관되게 생각을 정리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욥은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말하고는 있지만 기도라기보다는 하소연 하는 넋두리 같습니다. 이런 넋두리에 일관된 논리가 있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하지만 이런 넋두리 속에서 인생에 대한 새로운 통찰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욥은 고통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철저하게 깨닫습니다. “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2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사람은 그 사는 날이 짧습니다. 이 짧은 생에 어쩌면 그리 근심과 걱정거리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어쩔 때는 아름다운 꽃과 같이 빛나는 것과 같지만 이내 시들고, 그림자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날 수도 이미 정했습니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한계를 넘을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이런 사람에게서 더 이상 깊은 관심을 갖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짧은 인생, 사는 날 동안이라도 마음대로 숨 쉬며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인간의 한계와 유한성은 인간의 죽음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10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11 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12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아무리 건강한 대장부라도 죽으면 그냥 소멸될 뿐입니다. 물이 말라 버린 강처럼, 바닥이 드러난 호수처럼 사람도 죽습니다. 죽음은 사람이 경험하는 가장 절망적인 한계입니다. 살아가는 대부분의 시간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떤 소망이 있나요? 교회 마당에 작은 화단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화단은 말 그대로 황량합니다. 화단 위에는 거뭇거뭇 흙만 덮여있습니다. 나무에는 잎사귀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다 봄이 되면 느리지만 조금씩 변화가 생깁니다. 흙 위에는 초록의 작은 싹이 올라오고 나무 가지도 싹이 하나 둘 피워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화단은 온통 풀과 꽃으로 덮이고 나무는 초록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겨우내 죽은 것 같았던 화단이 봄의 부름에 응답하며 생명을 키워냅니다.
욥은 인간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나무와 비교합니다. “7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8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9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서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나무는 당장은 죽은 것 같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다시 때가 되고 물 기운만 들어가면 싹이 나고 가지를 뻗습니다. 반면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습니다. 나무와 달리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희망은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한계와 죽음을 이야기 했던 욥이 이제 소망을 이야기 합니다. “14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자신이 했던 절망의 말을 반복합니다. 아무리 장정이라고 죽으면 그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욥은 그 고난의 날을 참으며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다고 고백합니다. “15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 봄이 새싹을 부르듯이 주께서 자신을 부르면 대답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죽음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이 다시 부르는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난의 현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 사도는 산 소망을 이야기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로마의 박해시기에 교인들에게 쓰여 진 편지입니다. 지금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극심한 핍박 가운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죽음을 넘나드는 핍박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산 소망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왜 극심한 핍박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산 소망이 있습니까?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영원한 생명, 사라지지 않는 기업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근거 없는 허황된 소망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놓으신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를 거듭나게 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산 소망이 됩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욥이 가지고 있는 부활의 신앙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욥은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하고 다시 절망적인 자신의 현실을 눈을 돌립니다. 중요한 것은 그래도 이 절망 속에서 부활의 소망을 일말이라고 붙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욥은 앞서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에 부정적이었습니다. “7: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하지만 욥이 겪는 고통의 시간들이 부활에 대한, 영생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욥의 고난이 욥의 신앙의 학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고난과 고통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성찰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욥이 고난 속에서 이런 성찰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한탄하고, 넋두리를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고난의 문제가 조금씩 새롭게 보이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 가운데 고난이 찾아올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고난이 그냥 고통으로 지나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 고난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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